"관저에 백인 귀신 나온다" 추측 분분…재임 기간 케냐 경제 5배 성장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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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연감 편집위원회(KYEB) 발간 공식 기록물 '케냐타 캐비넷츠'(Kenyatta Cabinets) 사진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성진 기자 = 매일 저녁 7시 무렵 그가 집무를 끝내면 대통령 관저에서 출발해 약 50㎞ 떨어진 자택까지 요란하게 가는 모터케이드(차량 행렬)의 경광등 불빛과 사이렌 소리는 나이로비 주민들에게 일상적 볼거리였다.
대통령 관저에서 재임 기간 단 한 밤도 자지 않고 매일 왕복 100㎞(서울∼인천공항 정도 거리)를 출퇴근한 케냐 초대 대통령 조모 케냐타(1894?∼1978) 얘기다.
케냐타가 사망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한 15년간 스테이트하우스(State House)로 불리는 관저에 하루도 머물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는 "관저에는 유령들이 나온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령들의 정체는 다름 아니라 앙심을 품은 백인 식민 당국 귀신들이다.
원래 대통령 관저는 영국의 식민 지배 시절 영국 총독 관저였다.
젊은 시절부터 케냐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7년간 옥고까지 치른 영웅인 케냐타가 정말 유령을 무서워했을까.
일각에선 그가 투옥 경험에 따른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유령과 함께 개 짖는 소리도 들렸다는데 과거 영국 식민 관료가 부리던 개를 연상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다른 한편에선 그만큼 영국의 식민 지배를 몸서리치게 싫어했다는 방증이라고 한다.
또 다른 시각은 그가 자신이 속한 케냐 최대 민족 키쿠유족을 권력의 주된 배경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사저가 있던 가툰두는 키쿠유 민족의 심장부와 같았고 실제 밤에 많은 로비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일관되게 키쿠유 민족이 영국 백인 정착민들에게 잃어버린 토지를 되찾기 위해 투쟁해왔다.
앞 이름 조모는 '불타는 창'이란 뜻으로 케냐타는 영국 식민 지배층에 두려운 존재였다.
그는 1952년 마우마우 반란 주도 혐의로 다른 5명과 함께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때 영국군은 케냐 '반란 무리' 2만명을 학살한 것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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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 '케냐타 캐비넷츠'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그러나 그는 당초 혁명 급진론자가 아니었다. 1928년 키쿠유 신문을 발간하며 온건 개혁 노선을 걸었고 1930년 영국 더타임스에 기고해 토지권 회복을 조목조목 주장했다.
일제 치하 도산 안창호와 같이 당장 독립하기보다는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민족 개량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백두산과 같은 케냐 민족의 영산인 '마운트 케냐' 남서쪽 기슭 이차웨리 마을에서 촌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적도 근처 케냐 중심부에 위치한 마운트 케냐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킬리만자로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최고봉은 해발 5천199m이다.
10살 때 다리에 심한 감염증이 생겼는데 스코틀랜드 선교관에 가서 치료받아 나았다.
이때 경험한 선교관의 선진 문명에 끌려 사실상 가출해서 선교사가 세운 미션스쿨에서 교육받았다. 스스로 선교사 집에서 '보이'(boy·급사) 노릇과 요리사 등 막일을 해가며 학비를 대는 자립심을 가졌다.
이후 수도 나이로비로 가서 일하다가 1930년대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정경대(LSE)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1938년 '마운트 케냐를 바라보며'(Facing Mount Kenya)라는 책도 저술했다. 케냐타는 토지 소유에 기반한 키쿠유 문화의 정수를 표현하려고 시도했으며 인류학적으로도 아프리카 출신 저자라는 점에서 기념비적이었다.
그는 한때 공산당에 몸담았고 모스크바의 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63년 케냐 독립 후 총리에 이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동안 '용서하고 잊자'는 슬로건 아래 영국 등 서구와 원만하게 지냈다.
경제 발전 기조도 시장경제에 기반해 재임 기간 경제 규모를 5배 가까이 키웠다. 케냐를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 올려놓았다.
다만 나중에 그의 가족과 측근들이 막대한 부를 쌓고 알짜배기 토지를 키쿠유 민족 중심으로 편중해 일반 국민에 위화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는 후대 대통령 출신 민족에 따라 경제적 특혜를 편중하는 부패 논란으로 이어졌다.
일당 국가와 강한 중앙집권제를 추진한 그는 주민 스스로 자립정신을 갖자는 '하람베'를 외쳤다. 1964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한-케냐 국교를 수립했다.
케냐타 사후 뒤를 이어 부통령이던 다니엘 아랍 모이가 대통령이 되고 2013년에는 아들 우후루 케냐타가 역시 대통령이 되는 등 그와 직접 관련된 인물들이 약 50년간 케냐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기자가 특파원을 하던 당시와 지난해 나이로비를 방문했을 때 공항의 이름이 바로 조모케냐타이다.
케냐타가 영국 식민 당국에 체포된 날(10월 20일)도 당초 그의 이름으로 기념해 불리다가 2010년 개헌 이후 케냐 '영웅들의 날'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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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타 캐비넷츠'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케냐타는 언변이 뛰어난 카리스마형 지도자였다. 요즘 젠슨 황(엔비디아 최고경영자)처럼 자주 가죽 재킷을 입고 케냐 국민들 앞에 나섰으며 범아프리카주의의 동지인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로부터 선물 받은 플라이 위스크(말총 등으로 만든 채찍 모양 지휘봉)를 트레이드 마크로 갖고 다녔다.
국부로서 그의 애칭은 '음제'(Mzee)이다. 지혜로운 어르신, 할아버지의 의미이다.
참고로 뒷날 대통령이 된 그의 아들 우후루는 아버지와 달리 관저에서 잘 지냈으며 윌리엄 루토 현 대통령도 출퇴근이 아닌 관저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sungjin@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01월31일 08시00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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