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의 창] 라종억 "고려인의 자립, '녹명' 정신으로 도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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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중앙아시아 잔혹사와 희망의 기록 담은 답사기 9권 출간

황무지에서 건져 올린 23년의 집념… 독립운동가 아들로 태어나 고려인 아버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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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이 24일 서울 강남구 통일문화연구원에서 박정희·노태우·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훈장을 배경으로 최근 발간한 9권의 현장 답사기 시리즈를 들어 보이고 있다. 2026. 2. 24. phyeonsoo@yna.co.kr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남이 하지 않는 일을 가장 먼저 한다는 원칙, 그리고 먹이를 발견하면 동료를 부르는 사슴의 '녹명'(鹿鳴) 정신이 우리 사업의 핵심입니다. 고려인 지원은 이제 한국어 교육을 넘어 직업 기술을 전수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라종억(79)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은 24일 서울 강남구 통일문화연구원에서 연합뉴스와 만나 중앙아시아 고려인 지원 사업의 방향 전환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2001년부터 2024년까지 23년간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 있는 동포들의 삶을 기록해온 그는 최근 9권의 현장 답사기 시리즈를 펴내며 그간의 여정을 집대성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핵심 요인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제헌의원, 국회부의장을 지낸 백봉 라용균(1896~1984) 선생의 차남인 그는 "부친의 발자취를 따라나선 길에서 고려인의 아버지가 되겠다는 사명을 얻었다"고 말했다.

라 이사장의 여정은 1998년 사재 5억 원을 출연해 통일문화연구원을 설립하면서 본격화됐다. 부친이 청년 시절 상하이와 시베리아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다 일본군에 체포돼 고초를 겪었던 역사의 현장을 따라가던 그는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의 비극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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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시정부 사진을 가리키는 라종억 이사장

(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이 상하이 임시정부 안창호, 김구, 이승만 등 당시 임정 요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부친 라용균 선생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2026. 2. 24. phyeonsoo@yna.co.kr

"연해주에 살던 우리 동포 17만 명이 일본 간첩과 구분할 수 없다는 황당한 이유로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내몰렸습니다. 그 종착역이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였죠.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노인과 아이들이 숨졌고, 시신은 길가에 버려졌습니다."

그는 답사기 '중앙아시아를 품다'에서 우슈토베의 참상을 기록했다. 얼어붙은 땅에 토굴을 파고 겨울을 난 고려인들, 그리고 빵과 우유를 나눠주며 생존을 도운 현지 카자흐인들의 연대가 책 곳곳에 담겼다. "동포를 돕는 일만큼이나 그들을 품어준 현지인에게 감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라 이사장이 특히 애착을 갖는 사업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고려인 공동묘지 정비와 한·카자흐스탄 우호기념비 건립이다. 2018년 공동묘지를 찾은 것을 계기로 추모 공간 정비에 나섰고, 2019년 '동포를 하늘처럼 섬기자'는 의미를 담은 추모비 '동족여천'(同族如天)을 세웠다.

"우슈토베는 고려인들이 처음 삽을 들었던 곳입니다. 이름 없는 무덤들이 방치된 것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죠. 고려인협회와 함께 추모공원을 조성하고 비석을 세웠을 때, 현지 3~4세 고려인 청년들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찾으며 눈물 흘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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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바스토베 고려인 추모비 제막식

[통일문화연구원 제공]

2020년 우호기념비를 제막한 데 이어 이 일대를 '한-카자흐 우호공원'으로 격상시켰다. 공원에는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격려사와 라 이사장의 건립 취지문이 새겨진 우호 기념비가 설치됐으며, 한국의 개나리와 상록수를 심어 양국 우정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그는 추모에만 머물지 않았다. 2018년부터 현대병원 김부섭 원장과 함께 중앙아시아에 의료 봉사단을 파견해 현지 국립병원과 협력, 고난도 수술과 의료 기술 전수를 진행했다. 단순 지원을 넘어 현지 자립을 돕는 '메디컬 외교'였다. 이는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큰 찬사를 받으며 민간 외교의 모범 사례로 기록됐다.

이미지 확대 우즈벡 카라칼팍스탄 자치공화국 훈장 받는 라 이사장.

우즈벡 카라칼팍스탄 자치공화국 훈장 받는 라 이사장.

(서울=연합뉴스) 라종억(오른쪽)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이 지난해 6월 26일 우즈베키스탄 카라칼팍스탄 자치공화국으로부터 국가 개혁 및 교육 기여 공로로 훈장을 받고 있다. [통일문화연구원 제공]

이제 그의 시선은 '교육의 전환'에 맞춰져 있다. 기존 한글 교육 중심을 넘어 직업 기술 자격증 취득 지원으로 사업을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조선소 수요가 높은 용접, 제빵·미용 기술 등 취업 연계가 가능한 분야를 중심으로 교육을 추진하고, 국내 자격증 교육기관과 협력해 강의와 비용 지원을 병행할 계획이다. 국내 거주 차세대 고려인에게는 중·고교 과정 이수와 졸업장 취득을 돕고, 태권도 프로그램 연계도 추진한다.

"아무리 좋은 기획도 현지 행정기관과의 조정 없이는 실행될 수 없습니다. 실사구시와 현장 중심의 조정·실행력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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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하는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알마티=연합뉴스) 김상욱 통신원 =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이 3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알마티 KT&G 한국어학당에서 열린 개원식에 참석해 축사하고 있다. 통일문화연구원과 KT&G가 공동 후원하는 KT&G 한국어학당은 고려인 동포와 카자흐스탄인을 대상으로 초·중급 한국어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2023.6.3. almatykim67@yna.co.kr

카자흐스탄 지원 사업이 관광·교육 인프라 구축 단계에 들어선 반면, 우즈베키스탄은 의료 지원과 대사관 협력에 집중하는 중이다. 그는 인터뷰 자리에서도 태극기와 우즈베키스탄 국기가 나란히 새겨진 배지를 착용하며 사업 확대 의지를 드러냈다.

라 이사장은 최근 봉사 네트워크 '녹명(鹿鳴)클럽' 창설을 추진 중이다. 먹이를 발견하면 동료를 부르는 사슴처럼 나눔을 확산하자는 취지다.

그는 정부가 미처 닿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메우는 것이 민간단체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봉사는 드러내지 않고 하는 것이 미덕이라지만, 저는 오히려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이 '어떻게 돕는지'를 배우고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통일문화연구원은 의료 봉사를 원하는 단체와 현지 수요를 연결해 주는 '브리지' 역할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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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고려인 한글수업 참관

(서울=연합뉴스) 라종억(왼쪽) 이사장이 카자흐스탄 차세대 고려인들의 한글수업을 참관하고 있다. [통일문화연구원 제공]

그가 펴낸 9권의 답사기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비극과 희망을 담은 연대기부터 베트남 라이따이한 지원 기록까지 아우른다. 그는 "망국의 한이 서린 중앙아시아의 추모 공간이 우리 청년과 고려인 청소년이 함께 배우는 평화의 전당이 되길 바란다"며 "흩어진 민족의 파편이 하나의 모자이크가 될 때 통일의 문도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라 이사장은 오는 5월 21~25일 중앙아시아 고려인 정주 89주년 및 한-우즈베키스탄 수교 34주년 기념행사를 우즈베키스탄에서 개최한다.

phyeonsoo@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02월25일 10시31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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