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시선] 모스크바 기차역, 남북의 미묘한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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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횡단철도 종점 야로슬라블역의 두 한글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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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야로슬라블역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역. 2026.2.20 abbie@yna.co.kr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야로슬랍스키)역.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시발역이자 종착역이다. 이 역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타고 여행하면 한반도와 가까운 극동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갈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역에는 한글이 적힌 현판이 2개나 걸려 있다. 외국 기차역에 한글 현판이 걸려 있는 것 자체로 신기한데 야로슬라블역에 걸린 현판 1개는 남한, 1개는 북한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첫 번째 현판은 식당과 매점 등이 있어 행인들로 북적이는 장소에 걸려 있다. '모스크바 야로슬라블역-서울역'이라고 적혔고, 코레일(한국철도공사)과 러시아철도공사(RZD) 로고도 있다. 러시아와 대한민국이 인연을 맺은 흔적이다.

두 번째 현판은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공간의 넓은 벽 가운데 걸려 있다. 한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장 김일성 동지께서 1949년 3월 3일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련맹 야로슬라블리역에 도착하시였다'고 적혀 있다. 북한 관련 현판이다.

야로슬라블역의 한글 현판들이 한러, 북러, 남북 간 복잡 미묘한 관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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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야로슬라블역에 걸린 한러 철도 협력 현판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역에 걸린 한글 현판. 2015년 코레일과 러시아철도공사가 체결한 야로슬라블역-서울역 자매결연 협정을 기념하는 내용이 적혔다. 2026.2.20 abbie@yna.co.kr

남한 현판에 적힌 날짜는 2015년 7월 26일. 러시아어로 '유라시아 친선열차를 기념해 야로슬라블역과 서울역이 자매결연 협정을 체결함'이라는 설명도 달렸다. 2015년 한국 정부가 광복 70년을 맞아 벌인 '유라시아 친선특급' 행사를 계기로 러시아철도공사와 코레일이 협력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동판이다.

7월 26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기차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날짜다. 참가자들은 시베리아를 횡단한 뒤 폴란드를 거쳐 독일 베를린에서 여정을 마쳤다. 일부는 중국과 몽골을 거쳐 시베리아횡단철도에 합류했다. 2015년은 한러 수교 25주년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과 러시아에서는 각종 수교 25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하지만 현 한러 관계에서는 이렇게 활발한 교류를 기대하기 어렵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 이후 국제 정세가 요동치면서 양국 관계도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국제사회의 대러 제재에 동참했고, 러시아는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다. 지난해 수교 35주년도 조용히 지나갔다.

북한 현판은 북러가 어느 때보다 밀착을 강화하는 시기에 걸렸다. 불과 1년 3개월 전이다. 2024년 11월 1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최선희 북한 외무상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회담하기 전 야로슬라블역에 들러 이 현판 제막식에 참석했다.

현판 내용은 김일성 주석이 기차를 타고 야로슬라블역에 도착해 소련을 처음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라브로프 장관은 "러시아와 북한이 협력을 시작했던 시절의 기억을 강조하는 뜻깊은 행사"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한러 관계가 악화한 것과 달리 북러 관계는 끈끈해졌다. 국제적 고립 위기에 놓였던 러시아를 북한이 전폭적으로 지지·지원하면서 북러 밀착이 본격화했다.

2024년 6월 평양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회담한 뒤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에 서명했다. 상호군사원조 조항이 포함된 이 조약에 따라 북한은 러시아에 파병해 쿠르스크 영토 탈환을 도왔다. 러시아는 야로슬라블역에 현판을 걸어 북러 교류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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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야로슬라블역의 북한 현판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역에 걸린 한글 현판. 1949년 김일성의 첫 소련 방문을 기념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2026.2.20 abbie@yna.co.kr

북러 관계 강화는 우리 정부의 한러 관계와 남북 관계 관리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한러, 북러 관계 관리가 복잡해진 것은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함께 피 흘린 형제'라며 북한을 각별히 대우하면서도 한국과 다시 협력할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주러대사 신임장 제정식에서 "한국과 관계 회복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언론에서는 한국 기업들의 러시아 시장 복귀, 한러 간 직항 노선 복원 등에 대한 기대도 지속해서 언급되고 있다.

러시아가 중점적으로 개발 의욕을 보이는 북극항로와 관련해서는 우리 정부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북극항로 개척은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과제이기도 하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러시아대사는 최근 러시아 매체 인터뷰에서 "우리는 북극항로에 대한 건설적인 대화에 준비돼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북한과 의리를 지키면서 한국과도 실용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지를 내비치는 가운데 러시아가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모든 것은 우크라이나 문제가 얼마나 지속되느냐, 어떻게 마무리되느냐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우크라이나와 종전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아직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모스크바 야로슬라블역에는 한러 협력과 북러 협력을 각기 자랑하는 현판들이 태연히 걸려 있다.

abbie@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02월20일 07시05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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