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고민하며 기존 결 따라 골목 채워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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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연합뉴스) 나보배 기자 = 굽어진 작은 골목. 저 끝에 무엇이 있을지, 혹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질지 호기심을 안고 직접 발걸음을 옮겨야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곳.
전주부성의 남쪽 문이었던 풍남문에서 작은 나무줄기처럼 뻗어 나간 이 골목에 '남문 사잇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시작은 담백했다. 한옥마을이나 객리단길의 젠트리피케이션(낙후된 지역이 개발되며 임대료가 올라 기존 소상공인이 밀려나는 현상) 때문에, 혹은 낡고 손때 묻은 골목의 질감이 좋은 이들이 하나둘 자리 잡으면서 자연스레 형성됐다.
그렇게 카페와 소품 가게, 공방, 책방 등이 모여들며 적막감이 감돌았던 골목에 활기가 돌면서 새로운 시간이 쓰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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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나보배]
수제 소품 가게 '바늘소녀 공작소'를 운영하는 윤슬기(36)씨는 "마땅히 이 길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골목에 자리한 사장님들끼리 이름을 붙여보기로 했던 게 시작이었다"며 남문 사잇길의 출발점을 설명했다.
그가 이곳에 자리 잡았던 건 2014년 늦겨울이다. 전주한옥마을에 상업시설이 집중적으로 들어서면서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됐고, 새로운 장소를 찾던 중 구석에 남아있던 한옥을 발견했다.
당시 이 골목은 인적이 드물어 을씨년스러웠다고 했다. 한국전쟁 직후 구호물자와 보급품이 거래되던 '고물자골목'(구호물자를 빠르게 발음하며 줄이다 보니 고물자골목이 됐다는 말이 전해진다)으로 불리던 활력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윤씨는 "부동산 중개를 하시던 할아버지조차 왜 젊은 여성이 이런 곳에 들어가려고 하느냐며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며 "손님들도 골목이 무섭다고 말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제 그 골목은 청년들의 개성이 담긴 가게와 수십 년간 자리를 지켜 온 강정집, 옷 수선집 등이 어우러져 사람과 길을 잇는 공간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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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나보배]
이곳에선 좁은 골목의 폭만큼 가게들의 밀도도 높다.
문학·에세이 중심 서점인 '일요일의 침대'와 문구상점 '클립어데이'는 한 건물에 이웃해있고 맞은편의 작업실 '공간 리허설'까지는 대여섯 걸음이면 충분하다.
같은 골목을 공유하다 보니 옆 가게는 경쟁자가 아닌 동업자처럼 친근한 존재다. 서점 곳곳에 문구상점의 열쇠고리를 진열해 손님에게 소개하고, 잠시 자리를 비울 땐 선뜻 가게를 대신 맡아 주기도 한다.
내 가게가 쉬는 날이면 인근의 다른 가게들을 추천하며 그곳의 매력을 알려주는 '이웃사촌'의 모습도 흔하다. 시공간을 공유하는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유대가 골목골목에 담겨 있다.
'일요일의 침대' 책방지기 서지석(32)씨는 "남문 사잇길에는 이전에 운영하던 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협업의 즐거움이 있다"며 "비슷한 고민을 가진 이웃 가게들과 매달 만나 '무언가를 함께 해보자'고 머리를 맞대는 시간이 소중하다"고 말했다.
서씨는 지난해 5월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 주변 가게들을 방문하면 엽서를 나눠주는 '펜팔 교환소'를 기획해 골목의 연대를 끌어냈고, '바늘소녀 공작소' 역시 이번 설 연휴 기간 주변 가게 영수증을 가져오면 뜨뜻한 붕어빵을 한 마리 선물하기로 했다.
오래된 골목에 새로운 시간을 덧대고 있는 가게들이 바라는 건 단 하나다.
이 골목이 그래왔던 것처럼 너무 빠르지 않게, 기존의 결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채워나가는 일이다.
2019년부터 카페 '라스트위크'를 운영하는 이찬영(38)씨는 "우리 카페에 자리가 없더라도 손님이 근처 가게 어디에서든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건강한 상권이 형성되는 게 중요하다"며 "각자의 색을 가진 가게들이 서로 스며들며 도움을 주고 있는 지금처럼 재밌게 카페를, 이 골목을 꾸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warm@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02월16일 10시00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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