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제국의 귀환, 신냉전의 가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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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창 경쟁 나선 미·중·러…긴장 속 급변하는 국제정세, 구한말 데자뷔일까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자신을 정확하고 냉정히 평가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 애석하게도 우리 민도는 이 부분에서 그리 높지 않다는 말을 듣는다. 정(情)이란 말을 좋아하는 국민성에서 보듯 이성보단 감성에 기우는 성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국제 관계에서 자기 위치를 진단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건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겪은 여러 고난을 돌아볼수록 부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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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러 정상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금지]

세계 주요국들이 식민지와 신대륙을 개척하던 대항해 시대엔 왕실 장례 예법을 놓고 정치권이 싸우느라 허송세월했고, 산업혁명 시기 선진국들이 혁신과 부의 대폭발을 이어갈 때 우린 자물쇠를 잠가 국력 약화를 자초했다. 그동안 이웃 일본은 항구 문을 열고 개혁을 거듭해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최강을 다툴 만큼 성장했다. 나라보단 왕실 수호가 목표였던 말기 조선 왕조는 왕비 세력이 비선에서 국정을 농단하며 열강 중 하필 최약체인 러시아와 손잡았다. 당시 패권국 영국은 주적 러시아를 조선이 끌어들이자 동맹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했다.

저런 나라가 안 망한다면 이상하다. 지도층이 국제 정세를 못 읽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유아적이고 감정적 결정을 내리면 결국 피해는 국민에 돌아간다. 우리가 일제 강점, 남북 분단, 6·25 전쟁이란 대비극을 연쇄적으로 겪어야 했던 이유다. 당시 지배 세력은 누가 세계 질서를 움직이는지, 누구 편에 서야 하는지, 우군으로 포섭할 나라에 반대급부로 뭘 줄지, 부흥을 위해 어떤 산업을 육성해야 하는지 등을 알지 못했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이미지 확대 6.25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

6.25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굳이 구한말을 거론한 건 요즘 국제 정세가 그때만큼이나 심상치 않아서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폭도 예상하기 어렵다. 미·중 헤게모니 대결을 중심으로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이 사생결단 싸움처럼 격화하고 있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은 19세기 제국들 못지않게 노골적인 세력 확장에 나섰다. 말 그대로 '제국의 귀환'이다. 자유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맞섰던 20세기 냉전이 소련 해체로 종식된 이후 이른바 '세계화'란 코드 아래 협력하는 듯했던 열강들이 다시 제국의 깃발을 들고 전장에 섰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 시스템, 자유 무역, 국제기구를 통한 규범으로 세계 패권을 유지했던 자유주의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의 수명이 다했다고 판단한다. 이에 따라 국익을 철저히 우선하며 팽창하는 제국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최근 베네수엘라 침공, 그린란드 영입 시도 등은 서막일 뿐이다. 서반구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 강화와 유라시아 영향력 유지를 위해 군사 행동과 경제 제재 등 가용 수단을 다 동원할 태세다. 관세 카드와 석유 공급망 흔들기로 국제경제 시스템과 체질도 재편 중이다. 이는 군사 조치나 외교 압박과 별개로 중국을 위시한 적대적 경쟁자들의 전력을 약화하고 내부 붕괴를 도모하려는 포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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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마두로

미군이 기습적인 군사 작전으로 체포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 [트럼프 트루스소셜 계정. 재판매 및 DB 금지]

이 같은 국제 정세 변화는 중국의 급부상이 촉발한 측면이 크다. 중국은 경제가 급성장하자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힘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 유훈을 버리고 보란 듯 팽창주의 노선을 걸어왔다. 남중국해 인공섬 요새화, 인도와 국경 분쟁, 대만 해협 군사 위협, 호주·한국 등에 대한 경제 보복, 자국 내 소수 민족 탄압 등은 대표적 사례다. 특히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통해 유럽, 아프리카, 남미까지 영향력을 확대 중이다. 물류 진출로를 확보하고 외교적 우군을 늘리는 한편, 개도국 인프라 운영권을 장기 임차하는 방식으로 군사 요충지를 사실상 점유하는, 전형적인 제국의 행보다. 인공지능(AI)을 비롯한 기술 주도권을 쥠으로써 미국을 누르고 패권국이 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이미지 확대 중국이 군사기지화한 남중국해 스프래틀리제도의 수비 암초.

중국이 군사기지화한 남중국해 스프래틀리제도의 수비 암초.

[CSIS 홈페이지 캡처. 재배포 DB 금지]

러시아는 소련 붕괴 후 힘이 빠졌지만, 제국의 본성만은 잃지 않았다. 세계 최대 영토에 군사력도 최정상급인데 경제력은 '미들 파워'인 러시아는 살림에 비해 국방비가 과도한 기형적 구조 탓에 미·중 같은 입체적 전략을 쓰기 어렵다. 그래서 여전히 고전적 물리력으로 제국의 위상을 유지하려 한다. 우크라이나와 진행 중인 전쟁이 단적인 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고토(古土) 수복'으로 규정한 만큼 장기전도 불사해 완수할 계획이다.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벨라루스를 아우르는 연합 체제를 구축해 '위대한 러시아'를 재건함으로써 서방에 맞서고 중국의 비상을 억제해 유라시아 맹주 지위를 회복하려 벼르고 있다. 미국과 핵 경쟁을 국제 정세 흔들기에 활용하는 전략도 여전하다.

이미지 확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CG)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CG)

[연합뉴스TV 제공]

제국은 참치와 같다. 움직임을 멈추면 사멸하는 숙명을 지녔다. 페달을 돌리지 않으면 쓰러지는 자전거에도 비유된다. 역사적으로도 거대 제국은 확장을 중단하는 순간 내부 모순이 한꺼번에 터지며 무너졌다. 로마도, 페르시아도, 몽골도 그렇게 사라졌다. 현대 제국인 미국, 중국, 러시아가 끊임없이 팽창을 추구하는 건 옛 제국들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영토와 영향력 확장 경쟁에서 지는 건 단순한 패배가 아닌 국가 소멸을 뜻하니, 이미 출발선을 지난 제국 간 경쟁은 누가 이기든 결승점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열강이 아닌 나라들엔 다시 시련의 계절이 돌아온 듯하다. 특히 우리처럼 지정학적으로 민감한 위치에 있고, 대외 무역 의존도가 극도로 높은 나라는 더욱 그렇다. 이번만큼은 과거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세계 흐름에 둔감한 선천적 DNA를 극복하고 지금의 변화를 정확히 읽어내야 한다. 무엇보다 장기적 이익을 내다볼 줄 아는 냉정한 처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제국 간 다툼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를 놓고 최대한 근접한 예측을 유지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아울러 열강 간 힘겨루기 속에서 적절히 줄타기하면서도 소속 진영과 동맹으로부터 배신자로 오해받지 않도록 하는 고난도의 외교 능력이 요구된다.

leslie@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02월08일 07시00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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