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가교 아닌 갈등 조장? 유럽서 '선 넘는' 美대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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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프랑스·폴란드·덴마크 등 곳곳서 거친 언사로 파문

"절제된 외교 활동보다는 트럼프 관심 끄는 데 집중"

이미지 확대 벨기에 외무부 청사 나오는 빌 화이트 미국 대사

벨기에 외무부 청사 나오는 빌 화이트 미국 대사

[Belga /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브뤼셀=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재외 공관의 최고 책임자인 대사는 자국 국가원수를 대리해 주재국에 자국의 의사를 전달하고, 주재국과 자국의 우의 증진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하는 임무를 맡는다.

오랜 외교관 생활을 거쳐 '외교관의 꽃'이라 불리는 대사직에 도달한 이들은 세련되고, 절제된 매너를 갖추게끔 긴 세월 단련된 터라 튀는 행보로 물의를 빚거나 대중의 이목을 끄는 일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 유럽 곳곳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임명한 대사가 거친 언행으로 파문을 일으키며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특히 벨기에, 프랑스, 폴란드, 덴마크 등 전통적으로 미국과 긴밀한 여러 국가에서 근래 미국 대사가 내정 간섭으로 간주되는 발언이나 상대국 인사들에 대한 무례한 언사로 잇따라 주재국과 충돌했다.

벨기에에서는 빌 화이트 미국 대사가 무자격 할례 시술에 대한 벨기에 당국의 수사를 '반유대주의'라고 비난하며 유대교 할례 시술사들에 대한 기소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가 벨기에 정부에 초치돼 항의받았다.

벨기에 항구 도시 안트베르펜에서는 의료면허 없이 할례를 시술한 혐의로 남성 3명이 수사선상에 올랐는데, 종교 전통이라도 무면허 할례 시술은 불법이라는 게 벨기에 당국의 판단이다. 남자 아기가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성기 일부를 절제하는 할례는 유대교의 전통이다.

화이트 대사는 그러나 외무부에 초치된 이후에도 자신과 회동 직후 악수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프랑크 반덴브라우커 벨기에 보건장관을 "몹시 무례하다"고 공개적으로 저격하는가 하면, 벨기에 연정의 일원인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의 코너 루소 대표가 트럼프 대통령을 히틀러에게 빗대 비판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미국 입국 금지를 위협해 재차 도마 위에 올랐다.

반덴브라우커 벨기에 보건장관은 화이트 대사의 이런 행보에 대해 현지 라디오에 출연해 "그는 벌써 여러 번 외교관으로서 선을 넘었다"며 불쾌감을 드러내며 벨기에가 권력 분립이 이루어지는 민주주의 국가임을 강조했다.

그는 "이곳에서는 판사들이 독립적이고, 장관은 (할례 시술)판결에 개입할 수 없다"며 "미국 대사가 우리 정부에 사법 절차를 중단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미지 확대 찰리 쿠슈너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찰리 쿠슈너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프랑스에서는 우파 청년이 급진 좌파 활동가들의 집단 폭행에 숨진 사건에 대한 미국 국무부의 논평이 양국 외교 갈등으로 번진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의 사돈인 찰스 쿠슈너 대사가 프랑스 정부의 초치에 불응해 분위기가 더욱 냉랭해졌다.

쿠슈너 대사는 워싱턴 조야에서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는 트럼프 대통령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의 아버지이다. 그는 작년에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를 지적하는 서한을 보내 갈등이 빚어졌을 때도 프랑스 외무부의 초치를 거부하고 부대사를 보내 프랑스를 자극했다.

장 노엘 바로 프랑스 외무장관은 그의 잇단 초치 불응에 "대사로서 프랑스에서 자국을 대표하는 영예를 누리는 사람은 외교의 가장 기본적인 관례를 존중하고 외무부의 초치에 응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가 우리나라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쿠슈너 대사의 프랑스 정부 고위 인사 접근권을 차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프랑스 측의 강경 대처 움직임을 감지한 쿠슈너 대사는 지난 24일 바로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프랑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사태는 일단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폴란드에서는 이달 초 톰 로즈 미국 대사가 "트럼프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며 트럼프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브워지미에시 차자스티 폴란드 하원의장과 외교적 접촉을 끊겠다고 선언, 눈총을 받았다.

아이슬란드는 지난 달 중순 빌리 롱 주아이슬란드 미국 대사 지명자가 꺼낸 "아이슬란드가 미국의 52번째 주가 될 것"이라는 농담에 "모욕적"이라며 들끓었다.

켄 하워리 덴마크 주재 미국 대사는 그린란드 갈등이 한창이던 지난 1월 미국이 주도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이 당시 전사한 동료 44명을 기리기 위해 미국 대사관 앞에 설치한 덴마크 국기 44개를 일방적으로 철거해 긴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기업가 출신의 하워리 대사는 트럼프 대통령 2기 취임식에 100만 달러를 기부한 이력이 있다.

이미지 확대 킴벌리 길포일 그리스 주재 미국 대사

킴벌리 길포일 그리스 주재 미국 대사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트럼프 행정부의 대사들이 유럽 곳곳에서 외교 결례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외교 현장에서 단련된 직업 외교관을 제쳐놓고 사적 인연이 있거나, 정치 자금을 기부한 외교 문외한으로 주요국 대사직을 채우는 것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주그리스 대사에 장남 트럼프 주니어의 전 약혼녀인 킴벌리 길포일, 스페인 대사에는 새 백악관 연회장에 기부한 벤저민 레온 주니어를 앉힌 것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주재국이나 국무부와 소통하며 신중하고, 절제된 외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을 끄는 것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고 폴리티코 유럽판 등 유럽 매체들은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기 들어 관세와 방위비 지출 확대 등으로 유럽을 더 거세게 압박하고 있다. 여기에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사상으로 무장한 채 임명권자의 입맛에 맞는 요란한 언행을 일삼는 미국 대사들까지 더해지며 유럽의 당혹감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ykhyun14@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02월27일 07시01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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